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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가 규정한 여성(性)의 ‘순결’과 ‘깨끗함’?…”매력없어!”

    자본주의가 규정한 여성(性)의 ‘순결’과 ‘깨끗함’?…”매력없어!”

    하나님이라 칭해진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월렘 대포)의 재창조된 인간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가 벌이는 아이의 ‘뇌’를 지닌 ‘순수’한 육체인 한 인간의 세상 속 성장 드라마.

    밸라는 한 권력가인 장군은 전 처였으나 자유를 향해 뛰쳐나와 자살을 시도, 고드윈에게 발견돼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받아 다시 살아난다.

    구속받는 게 몹시 싫었던 그녀는 의사 맥스(라마 유세프)와 결혼을 미룬 채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와 세계여행을 시작하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스토리는 시작된다.

    사회가 규정해 놓은 여성의 ‘성’의 정체성과 개인의 선택의 전제인 자유의지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증하는 시간이었다. 자본주의가 내우는 기준인 ‘돈’과 여기서 나오는 권력(주로 남성이 쥐고 있다) 그리고 ‘순결’이란 이름으로 ‘성’을 규정해 놓고 자유를 제한하는 닫힌 세상에서 ‘순수;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성장한 주인공은 적어도 ‘이정도는’하며 여성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선택의 ‘정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

    주인공은 오감의 만족을 찾기 시작하면서, 하나남의 굴레(에덴)에서 벗어날 것을 선택한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막자 벨라는 마차에서 뛰쳐 나오면서 걸음이 시작된다. ‘자위’를 발견하면서 쾌락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사랑과 섹스에 자신이 있다는 던컨을 만나 동반 여행을 선택한다. 식사자리 예를 갖추라는 요구에 느낀 바 원하는 것을 서스름없이 말하는 대목에서 통제하려는 상대(던컨)만 속을 앓는다.

    사실 마주앉은 상대나 함께 있던 다른 이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불쾌했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 천진난만하다고 웃어주고 편드는 모습이 더 많았다.

    자칭 보호자이자 반려자인 던컨만의 체면을 위한 선택은 벨라에겐 무의미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으스대던 남자의 무기는 ‘당장의 필요자금’과 ‘성적 만족’ 두 가지였던 것 같다. 벨라는 이 둘에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만다. 거대 유람선에서 새롭게 만난 한 귀부인과 동행자 흑인남자는 책을 통해 ‘지적인 만족’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배 밖 살육이 일어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의 어려움과 잔혹한 현장을 보여줘,

    ‘동정’과 ‘연민’의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벨라의 진정한 감정을 끌어내 준다. 이때 그녀는 운다.

    영화 <가여운 것들>의 한 장면

    엠마스톤이 주인공 벨라 벡스터를 열연했다.

    던컨이 도박으로 번 돈을 모두 선원에게 전달해 버린 벨라는 파리로 가 직접 돈을 벌어보기로 한다. 매춘굴에 들어가 종교나 남성들이 규정해 놓은 ‘순결’이라는 것이 사실 그들을 위한 것이고, 변태적 성교가 난무하는 바닥을 경험하면서 여성의 ‘성’이란 것은 존중 받아야 할 ‘무엇’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구로 인식될 수 있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소유주 관리의 차원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이를 두고 ‘불결하다’고 불평하던 던컨은 “사랑한다”며 결국 자존심을 걸고 돌아와 애걸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매력없다’며 눈을 돌리는 그녀의 주관 앞에 힘을 잃는다.

    시각과 가치관이 바뀌면 ‘돈’이나 ‘성적 매력’ 역시 무의미하다는 듯한 메시지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유의지가 주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후 만나게 되는 과거 전남편 장군(권력자) 역시 그녀가 매춘굴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듣고 고용한 의사에게 성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한다.

    결국 벨라의 용기에 총알은 자신에게 박히지만. 사실 더러운 것을 지적하는 사람이거나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치고 정작 자신이 깨끗한 사람은 거의없다는 기자의 생각에 손바닥을 명쾌히 마주치는 시간이었다.

    부연하자만 순결과 깔끔함은 추구하면 좋은 것이지만, 자신이면 족하다. 깨끗하길 원하면 자신이 씼으면 된다.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욕망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남의 더러움을 치우겠다고 바꾸고 통제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의 자유를 지적하고 재단하려는 모습들이 우리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지 않나?

    기자로써 영화는 내게 그렇게 해석됐다. 자본의 세상에 굳이 고루한 사회주의까지 가지 않아도…

    영화 ‘가여운것들’은 작년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여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작품이다. 감독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이 그레이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 [서평: GRIT] 자살과 스트레스 1위 한국, 우울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서평: GRIT] 자살과 스트레스 1위 한국, 우울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

    3년 전 우울증 약을 끊었다. GRIT은 약을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내 인생의 주옥같은 책이다. 한 가지 인상적인 실험이 나오는 대목을 뽑아 경험한 그대로를 적어본다. 우울증 자체보다 의존이라는 부작용에 20년 이상의 젊은 날을 허우적댔다. 제약회사와 혈세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 대학종합병원 교수들은 5분의 상담도 지나지 않아, ‘환자가 많다’는 이유로 ‘잘 모르겠다’는 어눌한 환자의 한마디만 듣고, 차트대로 복사-붙여넣기 처방을 반복했고, 그렇게 인생은 망가졌다. 물론 모든 경우가 다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건 전제다.

    주로 우울증 약은 호르몬 조절이 목적이다. 조절 차원에서 균형을 맞춘다면 좋겠지만, 동일한 스트레스성 환경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상황은 이 작용이 강화되기 딱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강력한 부작용인 의존성을 몸이 익힐 수 있다. 이 과정을 십수년 반복했다.

    ’그릿’에서는 개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이 소개된다. 전기충격을 가한 뒤 적절히 움직였을 때(통제) 멈추게 된다는 학습을 한 개와 전기충격만 가해진 개 두 가지 조건을 설정해 놓는다. 다음 날 전기충격을 가했을 때 담장을 넘는 개는 충격을 통제했던 무리였고, 그렇지 못한 개들의 3분의 2가 웅크리고 실험이 끝날 때까지 낑낑대기만 했다. 이에 대해 무력감을 낳는 요인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한 실험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통이라고.​이 실험은 1964년 행해졌는데, 이후로 10년 동안 진행한 추가 실험들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식욕과 신체 활동의 변화, 불면증, 집중력 저하 같은 우울증 증상을 초래한다는 결과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한다. 무기력은 분명 학습된다. ​모두가 알겠지만,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우울증은 삶의 문제,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다. 대인관계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같은 사건들이 우울증에 작용한다. 비관적인 사고와 낮은 자존감, 무엇보다 문제 해결에 실패했을 때 오는 통제감의 상실 무기력. 거기서 나오는 무력감. 감정이 반복되면 강화되고, 늪에 빠지게 된다.

    우리나라는 스트레스 지수 1위, 자살률 1위 국가이다.’그릿’에는 우울증에 대한 해결책이 분명 담겨있다. 골자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유발하는 요인은 객관적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학습된 무력감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이면엔 ‘학습된 낙관주의’를 설명한다.​

    나쁜 일을 맞닥뜨리는 데는 누구나(낙관론자나 비관론자) 마찬가지다. 차이는 그 일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었다. 낙관론자는 으레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일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찾는다. 특수한 원인으로 ‘해결 가능성’이 있어 문제 극복할 동기를 부여한다.

    그릿의 전형들은 실망스러운 일들을 회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일이 생기든 거기서 배울 점을 찾고, 계속 밀고 나간다는 것. 이 부분에서 인지행동치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아론 벡이라는 심리학자는 과거 아동기 갈등이 양산한 무의식이 정신질환의 원인이라는 기존 프로이트 학파의 관념을 과감히 거부했다.

    방법은 대화기술이다. 부정적인 자아와의 대화에 유의하면 부적응적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분명 이 기술은 고통스러운 반복과 학습을 통해 가능하다. ‘No pain, no gain’은 자명한 진리, 그 확실한 방법론을 ‘그릿’이라 책은 설명하고 있다. 흔히 익히는 다른 기술들처럼 우리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낙관론자처럼 해석하고 반응하도록 연습할 수 있으며, 그 효과가 항우울제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입증됐다는 내용이다.

    학습된 낙관주의라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태도를 말한다. 태도의 근원은 생각이며, 그 생각이 증상 치료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 결국 ‘그릿’, 마음이 열쇠이며 방법이다. 약은 보조제일 뿐이며, 그렇게 생각해야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릿의 전형들과의 면담, 50년 동안 축적된 심리학 연구 결과들이 전부 동일한 상식적 결론을 가리켰다.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계속 찾는다면 마침내 그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해 방법이 없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포기한다면 단언컨대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희망을 품어라. 그릿을 좌우하는 희망은 우리의 노력이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내일은 나아질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나은 내일을 만들겠다는 결심이다.

    (그릿이 말하는) 희망은 행운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다시 일어서려는 자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감정이나 느낌을 중시하는 태도는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릿 즉 의지가 담긴 마음(心)에 모든 것이 달렸다. 혹시 누군가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감정이 상해 있나요?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술을 드시나요? 뒷담화로 누군가에게 전달해서 풀고 계시나요? 모두 감정 강화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책의 표지에서 말합니다. 당신에겐 ‘그릿’이 있는가? 올바른 ‘마음’이 있는가?

  • ‘분노’가 거세된 한국, 그 원인은 어쩌면 지식인과 언론?

    ‘분노’가 거세된 한국, 그 원인은 어쩌면 지식인과 언론?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한국 지식인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 꼬집은 책이다. 2000년에 발간된 저서이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뭣이 바뀌었을까? 문명은 진화해도 인간은 어리석음을 반복한다고, 현재 한국사회 역시 이면에는 같은 그림자가 짙다.

    분노가 건강에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저자도 밝혔지만, 옳은 생각을 지키기 위한 분노는 자신에게 굉장히 이롭다. 물론 조직에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진 않다. 밥벌이와 상관이 있을 테니깐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에게 심하게 농축돼 쌓이는 인지부조화가 주는 스트레스가 더욱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사실.

    강 교수는 2000년대 당시 한국인들이 분노를 잃은 까닭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추가로 기자의 생각을 덧붙여본다.

    첫 번째 원죄의식. 아주 쓸모없는 인식이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죄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누군가의 잘못을 비판할라치면 ‘넌 군사독재시절 뭐했나?’, ‘침묵하다가 세상 좋아지니 설치냐?; 다시 말해 그 말할 자격이 있냐고 누군가 물을 것만 같은 무의식의 발로. 원죄가 존재한다고 무엇을 해도 죄가 스며들어있다고 ‘정죄’ 를 기본으로 깔고 진리를 쫓는 이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뒤로는 헌금이라는 밥그릇을 채우려는 교회목사들과 같은 논리다. 실제 사회 구성원 누구도 자신에게 ‘설치냐?’는 등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게 ‘함정’, 그걸 누가 무의식에 심어 놓았는가는 한번 생각해 볼 일.

    두 번째 공범의식. 이 사회는 수구 기득권 세력이 힘으로 쥐고 있다. 그들에게 자원이 흐르는 줄 알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두머리가 ‘돼지’라고 조직 구성원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까 봐 주변에서 제기하는 옳은 소리에도 의례 눈치를 준다. 냉소주의 ‘너나 해라’;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내 몸 부재하기도 힘들다는 태도. 공적인 분노 따위는 사치 스러우니까 너나 잘 해보라는 것. 내 밥그릇 지키기도 힘든 세상에서 옳은 일에는 에너지 보태기 싫다는 심보. 사회가 연결됐다는 기본 전제조차 이해 못 하는’고립’된 인간상의 발현이다. 고립은 심한 스트레스를 주며, 심하면 우울증 나아가 치매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넷째는 ‘보신주의’ 다.주로 지식인에게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 비판을 무난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실명 비판은 절대 금기다. 추상적으로 싸잡아 두루뭉술하게 말이다. 실명비판은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해야 동시에 자신의 지적수준이 세련돼지나보다. 비판은 명확하고, 정조준해야 효과가 있다. 화살을 왜 쏘는가? 10점 만점에 10점이 목표 아닌가? 기업을 비판하면 브랜드를 공개해야 하듯, 사람을 비판하려거든 당연히 이름을 공개해야 하는 것. 그게 아니면 뜨끈하게 보신이나 하는 게 낫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저자는 이같이 분노 못 하는 한국인들의 행태가 자연스럽게 문화로 정착돼 버렸다고 말한다. 시민단체의 ‘무늬만 분노 행태도 꼬집는다’. 그들은 집단으로 행한다. 이런 분노는 ‘전략적이다.’ 집단의 이익이 걸려있기에 언론의 눈치를 본다. 이들은 “내가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 힘을 쥐어주면 같은 발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힘이 없다. 핵심은 한국 지식인이다.

    강 교수는 이들의 탐욕스러운 ‘내 이름 팔기’라는 매명주의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지성계에서 대표되고 있는 좌파들에 대한 지적. 이들은 비판으로 얻은 명성을 자신들의 입신 출세를 위해 사용한다. 명쾌하게 네이밍된다. ‘거세된 진보’

    상징과 장식으로 전락한 진보. 불필요한 갈등과 투쟁으로 비효율성과 비생산성만 양산한다. ‘천민자본주의라’는 푸줏간에 걸린 썩은 고기들.

    지식인, 소위 엘리트라는 것은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하는 인간들 뿐이다. 자기 집단을 위해, 아니 자신을 위해 가진 지식을 왜곡시키다 보니 결국 높아지려는 욕망으로 바뀌어버렸고, 상대적으로 다른 이를 아래로 떨어뜨린 것. 인간이 만들 것 중에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역설한다.

    집단주의와 파시즘. 또 달리 설명하자면 인간이 가진 욕망 중 큰 것 하나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인데 동시에 타인을 매도하려는 죄악까지 탑재한다.

    무엇보다 언론이 사회적 감시와 견제의 그물에서 벗어나 있다는 문제제기를 강력하게 펼친다. 우리 언론에는 수많은 성역과 금기가 있다. 이를 깨기에는, 상당히 피곤하다. 동시에 자기검열이 들어간다. 이어지는 무사안일주의, 신문사 상호 간 비판은 묵시적으로 금기시돼 있다. ’그 나물에 그 밥’

    입법, 사법, 행정에 이어 네 번째 힘은 ‘언론’이다. 앞 세 가지를 감시해야 할 위치에 있는 역할자들이 상당히 아프다. 조금만 건드려도 통증이 심각한가 보다. 서로 연결돼 있으니 말이다.

    이를 두고 강 교수는 ‘침묵의 카르텔’이라 이름 짓고 100% 합의 가능한 문제라고 진단한다. 문화에도 일정한 역할이 있다. 잡지 역시 신문이라는 기류에 편승하고 말았는데, 우리 문화는 내부고발자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조직 내 구성원은 모두 ‘마피아’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강 교수는 자신을 빗대어. 옳은 말을 하는 누군가를 죽이진 못하니.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다고 자신을 비판하는 몇몇 필자들을 에둘러 지켜본다. 이들은 샤덴프로이데를 작동해야 자신이 양심적인 사람으로 복원 가능하다. 요상한 심리다.

    고인 물은 200% 썩는다. 탄압 후 민주화 세대는 탄압이 사라지면서 싸워야 할 대상을 잃었고 이제는 평화로운 공간에서 투쟁해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됐다. ’누구나 인지하듯 이들은 수구 기득이 됐다. 이대로가 좋다는 것. 당연히 분노할 이유가 없다.

    강조하는바, 보다 개인적인 작게 하는 분노가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게 주장하는 핵심이다. 국민들에게는 기만적인 희망보다 정직한 절망이 더 낫다. “언어는 상스러운 세상을 반영해야 한다.” 기자와 생각이 너무 같아서 오랜만에 기분이 나아졌다. 사실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구나 싶은 마음도 든다

  • “제대로 된 리더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대로 된 리더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징기즈칸, 영국의 엘리베스 여왕, 미국이 말하는 강자의 조건”

    ‘강자의 조건’에서는 리더십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한국 독자들에게 심어주네요. 통솔, 지침, 장악, 통제, 나섬, 인정, 힘, 파워, 부드러움, 승리, 선점 등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을지 모르는 현재의 한국인들이 책을 통해 ‘진영논리’와 누구나가 고민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한국에 그려진 기울어진 운동장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책의 내용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의 용기를 가지고 적용만 할 수 있다면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와 대처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차를 살펴보면, 로마의 시민권, 몽고의 징기즈칸, 스페인을 굴복시킨 하찮았던 영국, 가장 작은 나라 네덜란드 그리고 현재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자유의 나라 미국의 세기의 명장 한니발이 온갖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음에도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이유, 100만 수준의 몽골인이 유럽에 걸쳐 전 세계의 다리를 놓아주게 된 이야기, 아프리카를 거쳐 전 세계를 호령하던 무적함대 스페인을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영국 해적 몇 척 가지고 게으르기로 유명한 영국인들이 제압했던 스토리, 주식회사의 시초인 동인도회사와 금융을 지배했던 유대인과 여러 종교와 인종의 결합이었던 우리 경상도만치 작은 나라 네덜란드, 그리고 독립전쟁 이후 흑인들의 살 떨리는 피의 투쟁이 만들어낸 마틴 루터킹의 자유의 호소를 반영한 헌장으로 집약된 ‘자유’와 ’기회’의 나라인 현재의 미국. 이 모두를 아우르는 리더의 조건에 대해 저자는 마지막에 이같이 말을 남기네요. 2500년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강대국을 만든 리더십의 실체는 힘이 아니다.관용과 개방을 통한 포용이다.

    처음에 ‘재미있다’에서 ‘역사는 반복일까…?“싶던 장은 미국 편으로 넘어가면서, 선대의 ‘선혈들이 튀어 써진’강대국 미국의 현재가 서술되면서 꽤 힘들고 고통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곧 지금의 미국인들을 이해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공감’이란 게 참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뇌에 각인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 듯이요.

    다시 책의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강자’, ‘리더십’이란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바와 맥이 거의 통합니다. 정리하자면 강자는 누군가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 강함에는 항상 마지막이 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항상 새로운 강자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요?. 강자의 조건으로 저자가 집약해 꽂고 있는 ‘관용’이란 개념은, 항상 내일이라는 시간에 새로운 강자를 눈앞에 내놓아 불안함과 긴장감에 조여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경쟁의 굴레에 뛰고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큰 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보면, 지난 시간 매 순간 어렵사리 결론지었던 ‘감사’와 ‘사랑’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현재의 세상을 만들어 준 조상과 선배 그리고 어른들에 대해 감사와 조의, 경의를 표하면서, 이제 세상의 리더로서 그 누군가는 ’관용’이라는 강자의 조건은 타인 혹은 사회가 정해놓은 선들을 다소 부담없이 넘어도 되겠다는 강력한 공감의 힘을 이 책은 불어넣어 줍니다.

    물론 적절한 대안이나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과 첨예한 이해관계 등의 넘어야 할 산들이 많지만 말이죠. 적어도 목표를 세웠다면 이 책을 통해 ;나아갈 좀 더 확실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 인생의 주인이고, 리더입니다. 모두가 현 상황이 녹록지 않고, 매일 고민이고, 뇌가 부담스럽고, 혈관 역시 어떻게 되고 있나 걱정스러운 마음뿐 일 것입니다. 그래도 부딪치는 상황과 만나는 벽들을 대적하고 피가 나더라도 튀는 걸 염려하지 않으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과정 자체로 관계 맺을 수 있으며, 이것이 강해지는 재차 과정이라는 매일의 중첩은 쌓여가는 인생의 경험과 시간 속에서 누적돼 가는 미래의 더 나아질 자기 인생의 초상화가 조금 더 명확하게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요? ​

    한번 적용해 볼까요?  일단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임을 잊지 마시기를. ​입사 지원을 앞두고 있나요?  회사 사람들은 내 상대나 대적이 아닙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력서나 자소서는 자신이 함께 그 회사라는 함선에 올라탈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표현해서 제시하는 충실하게 쓰여야하는 자신에 대한 설명서며 계획서이자 전략서입니다. 혹 인맥과 관련해 고민인가요? 내 인생에 누굴 끌어들일까?, 누구를 챙기고 말고, 혼자 이런 헤괴망측시런 고민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자의 조건이 ‘관용’이라면, 주체는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많은 이들을 인생이라는 함선에 초대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사실이 참 기쁘고 즐겁습니다. 진정 강자가 되고 싶다면 말입니다. 책에 따르면요. 인류를 끌어 온 강자의 역사가 증명한 내용 그대로요.

  •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2024 한국 사회에 비친 그림자”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2024 한국 사회에 비친 그림자”

    인류의 시대가 저물고 유인원과 퇴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황폐한 땅. 유인원 ’시저’의 계통을 이었다고 자칭하는 리더 ‘프로시무스’는 완벽한 자기만의 제국을 굳히기 위해 남은 인간과 유인원들을 사냥하고 다닌다.

    주인공은 유인원 ‘노아’다. 유인원 사이 숨어서 지내는 인류의 한 명. 그의 이름은 ‘노바’, 노아는 조언자 ‘라카’를 통해 노바를 알게 되고, 전 세대 ‘시저’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를 그려 나간다.

    줄거리는 노아가 독수리의 알을 얻기 위해 친구들과 절벽에 오르면서 시작한다. 다음 세대의 보존을 위해 하나만 꺼낸 ‘알’ 돌아와 칭송을 받지만, 어리석은 누군가의 욕심으로 ‘결속’을 뜻하는 알이 깨지고 그날 저녁 그는 회복을 위해 다시 숲으로 향한다. 거기서 부족원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정체불명의 또 다른 족속에게 발각된다. 오랑우탄과 흡사하게 생긴 이 부족장은 타고 온 말을 다시 보내 노아 부족의 거처를 알아내, 집을 태우고 부족원들을 납치해 간다. 모든 것을 잃은 노아는 우연히 라카를 만나 그의 선조인 ‘시저’에 대해 알게 되고, 노바와 함께 평화와 공존 그리고 궁극적 자유가 구현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노아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진 인간을 모사한 시저와는 다른 ‘선’으로 일관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지배자 ‘프록시무스’는 인간의 문명과 이로부터 나오는 기술을 배워 유인원의 세상을, 그 중심에 서려고 한다. 시저의 연대를 뜻하는 ‘뭉치면 강하다’는 사상을 자신에게 끌어와 유인원들을 자신을 숭배하도록 세뇌한다. 또 다른 메시지인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인간의 악한 존재로 정의하고, 이를 넘어서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

    노아는 공존과 평화를 향한다. 인간의 악함을 용인하면서 선을 믿는다. 뭉치면 강하기에 연대를 통해 프록시무스를 하나로 만든 전체의;힘으로 밀어내고, 평화를 만든다. 또한 유인원들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방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잔악함을 경계한다. 불신과 의심을 품었지만 동행한다.

    “책(지혜)과 총(무기)들을 지닌 채 유인원을 이것을 가질 수 없다’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배우려 하지만, 이를 전달하지 않으려는 인류. 노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노바에 죽은 라카의 목걸이를 건네며 인간과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건넨다. 인간의 기술 같은 것이 없이도 다음 세대에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유불급(중용)이라 이 장면은 인공지능(AI) 없이도 충분히 더욱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 세대에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앵글을 돌리면 등 뒤에 총을 든 노바,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으로 해석될지 모른다. 그보다는 어쩌면 동일 유전자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정의’였을 지 모른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성, 새로 태어나 이제 배워나가는 유인원 ‘노아’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중성은 이해의 차원에서 공감가능한 ‘필요’의 영역일 수 있겠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98% 전후를 공유한다고 한다. 거의 일치한다고 하는데, 영화 차원에서 유인원과 인류를 동등하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장면은 흡사, ‘세대교체’. 다시 시작하려는 구세대와 공존을 원해 손을 내미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와의 조우. 이 접점이 현재 필요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일 수 있다.

    시저는 연대를 통한 공존을 꿈꿨다. 노아에게 그런 시저의 사상은 새롭게 정립된다. 바로 ‘자유’다. 싸워 뺴앗고, 하나가 전체를 지배해 통제하는 세계에서 본질적 자유는 없다. 적어도’불’을 의미하는 ‘총’;으로 만든 세상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성경에서 노아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홍수, 즉 ‘물’이다. 물은 흐름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인간의 증식을 뜻하는 불이 결코 물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진리의 차원. 이 같은 상징은 등장 캐릭터의 이름에서도 스토리의 윤곽을 나타낸다.멸종 위기를 맞은 인류를 영화는 ‘에코’라고 명명한다. Echo는 영어로 메아리, 고대 그리스어로 ‘소리’라는 뜻이다. 신화 속 에코는 말하는 능력을 빼앗긴 요정이다. 살아남은 인류인 노바는 ‘Novus’라는 라틴어의 여성형으로 New(새로운)라는 의미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유와 승리의 신은 바로 여성이다. ‘노아’는 고대 인도유럽어 뿌리인 산스크리트 언어 ‘마누(Manu)’에서 유래한다. 인도 전설 소 홍수 영웅의 이름, 동시에 영어로는 Man, 이중 철자 M은 물을 뜻하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유래한다

    영화의 한 장면

    전편인 3부, 종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무리를 뜻하는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대변하는 ‘대령’, 시미안 플루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통해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변종이 생겨나고, 인간들은 지능이 감퇴하면서 언어(말하는 능력, 소리)를 잃어버린다. 대령은 플루 전염을 막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다. 스스로 무리에서 벗어난 인간. 즉 혼자만의 세계에서 소통에 문제가 생긴 이들은 자기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다 장벽을 구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영화에서 결국 불로 일으킨 문명은 물에 씌워 재만 남는다.반면, 시저는 늘 무리와 소통한다. 인간인 대령은 시저의 눈을 보고 인간의 눈이라 감탄한다. 의사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유인원만 못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가 전반에 흐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고립되고, 짐승이 되어 간다고 말했다. 나 노아로 구현되는 캐릭터는 위에 존재하지 않는, 균일한 전체 속 하나의 중심이자 또 다른 일원이다. 이 같은 소통과 전달의 체계 속 바이러스는 흩어져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리 속에서 떨어진 또 다른 고립에 전달된 바이러스는 당연히 그 안에서 증식, 재증식할 수밖에 없다. 1인 지배자인 프로시무스는 퇴화한 인간을 사냥해 노예로 삼는다. 퇴화의 전단계는 고립이다. 외로움은 단절을 뜻하고, 동시에 바이러스에 극히 취약한 상태가 된다. 여기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우울증과 치매는 고립으로부터 불거진 외로움에서 온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와 맞먹는다. 누적되면 이는 초고속으로 배가 된다. 대부분 사람은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들 한다. 하지만 병적인 외로움은 다르다. 불안과 우울감이 선을 넘으면 초기 상황이 된다. 뇌의 PSTS는 상대의 언행의 맥락을 해석과 파악하는 영역이다. 이런 뇌의 신호전달체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을 잘못 해석해 버린다.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가상 세계. 이곳에 빠져 잘못 형성된 공감력이다.

    올바른 인간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사회적 연결을 회복해야 한다. 직접 사람을 만나야 하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완벽하지 않다고 가정하고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타인의 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어쩌면 ‘기본전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두 부족하다. 지금 한국은 자살률 1위의 국가다. 전쟁 이후 빠른 성장 그리고 이후 극한 경쟁에 치달아 파생한 문제들이 지금의 우울과 불안에서 오는 자살율 그리고 치매 환자 급증 등의 통계로 치환한 게 아닐까?

    그냥 핸드폰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연결을 회복하지 않으면…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을뿐더러 종국에는 뇌가 망가진다. 그러다가 선을 넘으면, 돌이키기 굉장히 힘들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 “‘파묘’를 본 한국인 ‘1000만’, 이선균의 죽음이 떠올랐을까?”

    “‘파묘’를 본 한국인 ‘1000만’, 이선균의 죽음이 떠올랐을까?”

    <파묘 : 묘를 파는 이야기>. 전통문화를 배경으로 한국의 영상미를 과시했다. 전통무속인이 하는 굿을 소재로 인간의 영혼, 동물과 합체돼 진화한다는 정령의 이야기. 육체와 죽음 그리고 혼이라는 소재는 누구나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의 근원이 죽음이니까.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도, 욕망을 추구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에서, 그런 일련의 스트레스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몸부림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아무 사전 정보없이 들어간 영화 속에서는 두가지가 연계돼 떠올랐다.

    먼저, 일본의 잔재 청산이다. 여전히 우리 대한민국 어디에나 일본이 남긴 흔적들은 있다. 위도와 경도를 정확히 맞춰 묫자리를 봤고, 그곳에 일만명을 죽인 일본 전사가 수직으로 세워져 꽂히어 있다는 설정. ‘여우가 호랑이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가 영화의 맥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일본 잔재가 대한민국 땅 어딘가 아직 남아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나도 한국인으로 그런 과거의 잿가루 따위는 없어졌으면 싶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문화 외에 과거 침략사와 관련한 ‘아픔’은 이제는 잊었으면 한다. 역사는 기록되지만 고통을 일부러 선택할 필요는 없다. 반대급부로 한국 문화의 위대성도 돌아보게 됐다. 풍수지리. 우주항공학과 일치시키는 대목에서는 한국 토속문화와 서양의 과학과 맞닿아 있다는 새로운 정보도 알게 됐다.

    ’굿’ 이란 재밌는 소재가 떠올린 이슈 하나는 연예인 이선균과 관련이 있다. 마약과 검찰수사 그리고 언론의 때아닌 폭로, 그의 죽음은 많은 영화와 연예인들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다수의 사람을 울렸다. 보도를 보니 국과수를 통한 마약 복용 검사도 음성이었다. 검찰이니, ‘꽃뱀’이니 이런 이슈는 차치하고, 정작 취재도 안 한 내가 여기 적긴 뭐한 내용이지만, 내가 눈여겨 봤던 건 이선균 사건 일지를 쫓으며 유튜브를 주름잡던 ‘카더라’들이다.

    소위 이름있는 무당에게 이선균의 사주를 주고, 맞춰보라던 유튜버들이 많았다. 나 역시 이를 처음 보고, 믿었고 또 혀를 내둘렀다. ‘우와~’ 이놈 나쁜 놈이네, 연예인들이 줄줄이 엮여있나 보네, 우리나라 권력층에서 뭘 감추려고 이선균 카드를 썼나 보네. 무엇보다 사주를 가지고 사람의 운명을 맞추다니 ‘가정사까지 꿰다니’ 감탄의 감탄을, 그리고 솔찬히 이런 이슈 꺼리가 흥미도 있었다.

    당시 나도 사주나 볼까 해서 점집을 찾았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난 내년에 결혼하고 금과 목이 많고, ‘선생’; 사주고 연상을 좋아한다나?.. (글쎄다) 뭐? 내가 이렇게 산다고?, 삶이 왜 이리 재미가 없냐? 결혼이 내년에? 아직 벌어놓은 돈도 없는데..만약 내후년에 결혼하면? 내 사주가 바뀌나? 이를 물었더니 점집에선 과거 중국에서 내려온 ‘통계’ 상 그렇다. 다시 꼬치꼬치 물었더니, 하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내가 할 바라고 조언했다.

    며칠 후 유튜브를 통해 과거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을 봤다. 같은 사주를 가지고 유명한 점집에 거지와 부자로 변장시킨 두명이 사주를 봤는데, 서로 다른 운명이 나왔다. 취재진에서 다시 찾아가 물었더니 점집에서는 어린 시절과, 환경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다르다고? 엥? 사주가 맞다면, 같은 시간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운명을 타고 나야 하는 거 아닌가? 논리나 과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리상식이다. 사주가 맞는지 틀리는지 따지자는 게 이 글의 요지는 아니다.

    그보다, 이런 통계치나 전통의 이론을 통해, 이선균이라는 연예인을 가지고 조회수를 높여보려는 여러 유튜버들의 행태가 난 너무 싫다. 그 말을 하고 싶다. 인신공격, 남의 이야기나 남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고, 구설수 돌리는 것을 하나의 쾌락(快樂)이나 즐거움으로 아는 일부 몰상식한 이들이 존재한다. 그게 그들에게 돈이겠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만들어진 재미가 보는이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까?

    ‘극한 이기심’ 곧 남의 죽음을 끌어다 영상에 올리는 행위는 어쩌면 대상에 대한 간접 살인이자, 독자에 대한 기망이다.

    어쨌거나 과거는 지나간 일이니 돌릴 수 없고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니 하는 수 없겠지만, 결국 누구 못지 않은 훌륭한 사람 한명이 죄없이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대한민국 영화계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잊지 않고 있으리라. 어쩌면 영화에서 나오는 일만명을 죽인 일본 전사가 아닌 정반대로 다수에 의해 공격당한 한국인 한명이 묘지로 갔다는 건, 상당히 극적이다. 딱히 결론은 없다. 왠지 비슷한 시기에 대비되는 그림 두 장이 내 눈에 비췄을 뿐이다.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이 드러낸 인간과 자연의 대립 그 속에 쓰레기는 누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이 드러낸 인간과 자연의 대립 그 속에 쓰레기는 누구?

    베니스 국제영화제 작품상,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쳐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본 작품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한 지역 마을에 글램핑 야영장을 건설하겠다는 주민 설명회가 열린다. 이후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 현장을 잘 아는 똑똑한 지역 주민과 책상 앞 돈 계산만 하던 기업 자본가와의 대립 구도가 큰 그림이다.

    한 쪽은 자연과 순수의 형태를, 다른 한 쪽은 이익과 탐욕, 철저한 ‘악’이 바탕이 된 인간상 간의 대립이다. 진실은 엄연히 존재하나 이익에 눈먼 인간의 탐욕이 결국 생명을 죽인다.

    주인공은 야스무라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그의 딸 야스무라 하나(니시카와 료), 연예기획사 소속 개발분야 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 요양보호사였다가 기획사에서 업무를 맡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등이다.

    간명한 메시지에 단순한 줄거리다. 도쿄 근처 한적한 시골, 글램핑장을 건설하겠다고 코로나 보조금을 노린 그것도 연예기획사, 지역개발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업체 하나가 먹구름을 몰고 온다. 업자들의 논리는 지역이 개발되면 인구와 일자리 늘어나니 서로 좋은 게 아니냐는 것.

    보조금 수취를 위한 ‘쇼’같은 설명회에서 회사 소속 2인(타카하시, 마유즈미)은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에게 얼토당토한 소리라며 호되게 당하고 배운다. 결국 월급쟁이 신세에 업자 측은 ‘쓰레기’라며 마유즈미의 넋두리가 나오고, 다시 술 한병 사들고 설득하겠다고 찾아가지만, 타이밍과 자세가 필요한 장작패기 기술만 배우고 또 다시 예우와 정신을 차린다.

    주인공 야스무라는 직원을 상대하다가 딸의 퇴교를 챙기지 못하고 총에 상처가 난 사슴 뒤를 쫓다가 설원 한가운데 코피가 난 채 누워있는 걸 발견하고 만다. 무표정의 야스무라는 직원의 목을 졸라 버린 뒤(죽이진 못한다) 딸을 안고 숲으로 사라진다.

    영화는 상징이란 점을 사용해 선을 만들어간다. 대표적인 상징물이 ‘사슴’이다. 먼저 사슴은 주인공과 그 딸을 직유하고 있다. 자연 속 순수함을 나타낸다. 자연에 속한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는 총에 빚 맞았을 때 죽을까봐 두려워서 아니면 새끼가 죽거나 다쳤을 때 두 가지라고 한다.

    사실 그것도 편견일 것이라는 게 주인공의 말. 도시에서 재미 좀 보자고 내려오는 사냥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인간의 ‘악’을 상징한다.) 인간의 재미와 쾌감을 위해 시간과 흐르던 자연은 생기를 읽고 사라져 간다.

    영화 중 화면

    ‘물’ 역시 중요한 흐름의 단서다. 설명회에서 마을 이장은 중요한 자연의 섭리 한가지를 설명한다. ‘상류에서 물을 흐려 놓으면 하류가 망가진다는 것’ 위정자나 자본가, 즉 사회 결정권자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하류에 있는 대다수의 서민들 그리고 자연이 훼손된다는 것.

    몇 안 되는 몰상식하고, 이익만 쫓는 영화가 말하는 쓰레기들이 이상하게 성공한 자리에서 올라가 ‘악’에 영혼을 바치고 전체를 흐린다.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마약’이란 것도 한다. 누리고 즐거운 것도 모자라 무언가를 파괴하고 중독에 빠져 스스로 자멸하는 모양새. 문제는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쪽은 항상 피해자. 힘없는 대다수의 약자라는 사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의 ‘악’과 자연의 ‘순수’함 간의 대립구도가 작금의 지구 환경까지 기울게 만든 게 아닐까? 지금의 기후나 환경 문제 역시 맥락이 통한다. 좀 더 돈 벌자고, 조금 더 편하게 살겠다고, 그것도 일부, 극히 일부 쓰레기 떄문에 전체가 망가진다.

    자연과 이를 해쳐 돈을 벌어보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혼재돼 ‘악’이라고 표현돼 있지만 사실상 악은 엄연히 존재한다. 반어적인 표현인 듯. 기자가 바라 본 자본을 위시한, 인간의 욕심 자체가 어쩌면 악의 근원이다.

    하마구치 감독은 “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이러한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기 전, 제목에 나름 기대가 됐다. 그래도 ‘선’이란 것에 좀 더 기울고자 했다.

    하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봐서 말이다. 악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이 있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은, 좀더 강화된 확증을 가지고 나왔다. 영화는 자연을 상징하는 ‘숲’에 두 마리 상처입은 사슴이 거친 숨소리로 잦아들면서 안기 듯 끝난다.

    인간의 생을 관장하는 산소, 이를 생산하는 주체는 나무 그리고 전체인 숲이다. 그 안에 있어야, 숲이 살아있어야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다.

    며칠 전 목이 심하게 아팠다. 이상하다 싶어, 일기예보를 봤더니 중국에서 날아온 초미세먼지가 심각하게 서울 공기를 흐리고 있었다. 제대로 된 숨을 못 쉬게 돼, 온전히 산소를 못 들이마시니 당연히 통증이 수반된다.

    이 당연한 원리를 훼손하고, 돈과 욕심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부 ‘쓰레기’가 이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악의 근원은 사실 몇 안 될 것이라고 기자는 본다. 경험한 세상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4계절이 뚜렷한, ‘가보고 싶은 나라 1위’인 대한민국에 산소를 못 돌게 하는 일부 자본가와 위정자 그리고 숨은 세력이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멀쩡한 혈관에 무리를 가져와 국민들이 염증과 피를 내는 불균형이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 “춤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것”- 영화 ‘원앤온리’

    “춤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것”- 영화 ‘원앤온리’

    열렬(熱烈)이라는 원제처럼 항저우 올림픽을 앞두고, 끝없이 도전하는 중국 스트릿댄서(브레이킹/비보이)들의 열정적 삶이 담긴 영화 ‘원 앤 온리’ 13일 롯데시네마 단독개봉. 중국 Z세대 드라마 배우 왕이보가 주연을 맡아 작년 중국 개봉 당시 9억1200만 위안(한화 약 1692억원)의 수익과 22억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스포츠 영화다.

    홀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한 가정에서 댄서를 꿈꾸던 주인공, 천뤄(왕이보 역)가 코치 딩레이(황보역)가 이끄는 팀 이마크에 들어가, 거만하게 팀을 깨고 독립을 꿈꾸던 팀 에이스인 케빈(캐스퍼)를 꺾고 온리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코치 딩레이는 캐빈이 나가자 팀을 꾸려가기 위해 대체 연습댄서로 천뤄를 만난다. 댄서였던 아버지 세대, 최고의 실력자를 코치로 맞게 된 주인공은 꿈을 향해 도약할 최상의 기회를 맞게 된다.

    오만가지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겸손하게 배움에 임하는 태도로 캐빈이 비워둔 팀의 자리는 점차 밝게 채워져 간다. 성실과 열정 그리고 춤에 대한 사랑은 팀원들을 ‘춤’이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점차 커다한 원으로 키워간다.

    갈등 장면, 천뤄의 재능을 보고 밀어내려는 기독 세계의 캐빈은 팀을 꾸릴 수 있는 자금줄이 끊어진 코치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며, 코치로서 국가대표를 향한 개인적인 명얘욕을 건드린다.

    하지만 코치는 바보같이 한 곳만 바라며 굴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춤에 대한 열정을 선택한다. 코치는 말한다. “그동안 머리로 춤을 줬던 자신을 후회한다, 가슴으로 춤을 추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줬다”고 말이다.

    스트릿댄스 배틀 장면

    돈과 명예 등의 성공의 기준이고, 선택권을 쥔 강자의 입맛에 달면 삼키고, 써지면 뱉어지는 구조가 당연시 돼 버린 이 사회에게 영화는 이렇게 강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머리로 세는 숫자나 등급이 매겨지는 순위보다 중요한 것은 ‘춤’ 자체”라고.즉 본질. 본질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가장 자신다움. 색채. 물론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감정을 부르는 경우도 있겠으나, 정확히는 가슴이 시키면 머리는 따라온다.

    곧 그래야 제대로 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머리에서 나온 계산이 베이스가 된 행동과 마음이 바탕이 된 행동, 양 쪽에서 나온 ‘춤’은 그 에너지가 다르다. 에너지는 가슴이 시킨 움직임에서 나올 때 그 빛이 살아 숨쉰다.

    개인적으로 재능이나 지능은 사실 그다지 차이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동기를 가지고 정확한 과녁을 조준하고 집중해 쏟아넣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햇빛을 쬘 때, 돋보기가 있고 없고 차이라면 비유가 적정할까 싶다.

    1등과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과 매스컴이 정해 놓은 고정관념이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춤을 추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지 않나? 춤을 추면 건강에 좋다. 춤은 리듬과 박자를 타는 것이고, 흐름을 타는 것이며, 혈액이 도는 것이다.

    사실 무대는 필요 없다. 항상 자신만이 주인공일 수 있으며, 어쩌면 지금 서 있는 곳이 춤을 출 수 있는 유일한 무대다. 심장이 잘 뛰어야, 산소가 온 몸 구석구석 전달돼 건강할 수 있듯. 일상에서 내 가슴이 무엇을 할 때 언제 뛰는 지 한번 체크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아마도 가장 자신다울 때 아닐까 싶다.

  • “가상 성장의 즐거움, MMORPG 재도약?”…넷마블 ‘아스달연대기’ 4월 출시

    “가상 성장의 즐거움, MMORPG 재도약?”…넷마블 ‘아스달연대기’ 4월 출시

    양대양 구도에서 잔존세력으로도 성장…드라마세계관 확장

    MMORPG 축소된 시장 재도약 위해, 오랜 준비…글로벌 확장 ‘기대’

    15일 넷마블지타워에서 ‘아스달 연대기: 세 개의 세력; 쇼케이스’가 열렸다.

    아스달, 아고, 무법세력 3자간의 경쟁, 협력, 정치가 어우러진 게임으로 넷마블과 스튜디오드래곤의 합작 프로젝트 ‘아스달 연대기:세 개의 세력’이라는 드라마 세계관을 기반으로 무법세력이 추가돼 권력 투쟁을 벌이는 콘셉트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적 협력을 이뤄내는 요소를 적용했다는 설명. 게임은 캐릭터가 부모님과 마을을 몰살시킨 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배우고 성장하고 동지와 연대하고 경제력을 키워 힘을 모으는 과정 전반이다. 2018년 당시 300만에 달하던 MMORPG 게임시장이 30%대로 축소된 현재, 해당 게임이 가진 콘셉트인 스토리와 과정의 즐거움을 배가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는 게 넷마블 측의 의도다.

    장현진 넷마블에프엔씨 개발총괄은 “두개의 양대양 구도가 아닌 용병세력이 더해져 균형이 맞았고, 이 구도가 아스달연대기의 새로운 재미로 제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게임은 먼저 오는 4월 한국, 대만, 홍콩, 마카오에 동시 출시 (아쉽지만 테스트베드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필요하니) 글로벌 무대로 나아갈 계획이다. 23년 3분기, 넷마블 영업손실 873억, 매출 비중은 북미가 47%, 한국 17%, 유럽 12%, 동남아 10%, 일본 6%, 기타 지역이 8%, 해외비중이 83%이다.쇼케이스 막바지 기자들과의 시간을 통해 박영재 넷마블 사업그룹장은 “축소된 MMORPG 기존 게임에서 세력 구도에서 살아남는 강자뿐 아니라 중간 유저가 잔존할 수 있도록 파이를 넓혔고, 수렵・채집 등의 다양한 활동에 대비 배우는 과정은 유저 이탈을 줄이려 심플하게 해 지루함을 덜었다”며 “세계관을 다뤄야 하는 게임의 성격상 다양한 콘텐츠를 준비했지만 유저들이 폭넓게 다가서야 하고, 흥미를 잃지 않아야 하기에 업데이트와 이후 이벤트 등을 통해 추가로 더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길 위에 김대중’이 울린 한국 민주주의의 가치

    ‘길 위에 김대중’이 울린 한국 민주주의의 가치

    권력욕과 죽음 놓고 경쟁…피・땀 열매가 현재 민주주의

    하지만 ‘갑질’, ‘유리천장’, ‘금수저’ 등 여전히 국민이 도태된 사회

    총선 앞뒀지만, 리더의 교체가 의미하는 바는 한계가 ‘명확’

    김대중이란 인물이, 그런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지금 이런 민주주의라는 제제 아래 맘 편히 일하고,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박정희・전두환이라는 군대라는 힘으로 국민 위에 군림한 두 전 대통령의 권력욕 그리고 본인이 일련의 여러 사건을 통해 맞이할 뻔한 죽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두 가지와 경쟁하는 듯 살아온 듯하다.

    그의 삶은 현재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니. 광주와 과거 목숨을 바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옳은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선배들의 마음들이 모두 해당된다. 군부의 총칼로 광주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땅을 치며 애곡하는 우리 이웃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을 것이다. 현대사를 맺어온 우리 웃세대는 그렇게 시대의 문제에 뜨겁게 애통하는 마음이었고, 피를 흘려 싸웠고, 그 열매를 우리가 먹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한국의 대통령.. 이제껏 ‘에이~’ 아마도 지금의 현실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나와 같은 정도 아닐까 싶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메세지를 고스란히 전달한 영화 형식이 그다지 극적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몇 안되는 개봉관에 35석 전체 좌석 중 28번째로 들어앉은 작은 상영관. 그마저 현재를 살아 갈 젊은 사람은 한두 명 뿐이었다.

    당장의 의문. 왜 이런 중요한 내용을 우리 대다수는 모르고 있을까?. 책이나 글자로 안돼 영상으로 만들어졌어도, 상영관은 몇 안 되고 관심을 가지고 온 이들은 더더욱 몇 안 된다. 교육이 얼마나 주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 특히 정보, 올바른 사실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어도. 왜 그것이 필요한 국민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을까?. 글자를 접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까? 뭐 이렇게 영상까지 만들어질 정도가 돼야 하나. 창피한 일이지만 기자 현업에 종사하는 나마저 지금 보고 ‘오~ 이런’. 자조적인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었으니..

    우리는 남에 대해 알고 이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걸을 좋아한다. 최근 이선균 사건이 이를 확실히 방증한다. 관련 유튜브 콘텐츠와 이를 다룬 채널은 차고 넘치고, 하나의 사건으로 온갖 분야 전문가가 총동원됐다. 그런 한국인들이(나를 포함) 왜 자신의 뿌리, 우리의 역사, 근원, 부모님 세대가 피를 흘려 만든 민주주의, 즉 ‘맥’에 대해 무관심할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모르면 중심은 흔들리는 것인데 말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지금의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언론은 제대로 세상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 기자 경력을 돌아보면 언론사의 편집 과정에서 묻히는 기자들의 글과 생각들이 너무 많다. 국회엔 온 국민이 공을 들여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진 각종 법안들은 몇개나 통과됐는지. 국회에서 처리돼야 할, 아니 적어도 할 수 있는 많은 우리 이웃들의 마음들이 별 의미없이 사라지고 있다.

    몇몇 정치 권력이나 검찰, 혹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이해관계로 인해 버려져 왔다. 5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죽어간 이태원 사건은 1년 후에도 여전히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던 노조법이나 쿠팡을 대척해 소상공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온플법, 불필요하게 집중된 고위직 공무원들의 연금. 과대한 국회의석 수, 반대급부로 치우친 만큼 대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힘들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 아닌가? 의학이 발달하면 뭣하나, 여전히 금수저, 유리천장, 갑질 등이 난무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다. 법 체계는 일부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치우쳐 있는 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대기업 중심으로 끌어오다 보니 그 신화에 모두 매료되다 못해, 가스라이팅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혼란스러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상황말이다. 상대를 봐야 하는데, 누군가 지칭하는 불빛만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가 힘을 가졌다고 강조한다. 기자 역시 생각이 비슷하다. 발전이나 진보를 전개하고자 한다면, 우리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주인공이다. 누군가 1인이 바뀌지 않으면, 다수의 변화도 어렵다. 총선을 앞두고, 이번엔 조금 나은 지도자를 뽑아보고자 영화는 만들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내 관점은 명확하다. 개개인이 힘이다. 구심점은 당연히 존재할 수 밖에 없지만, 힘이나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몰려서는 안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언어 체계가 제대로 없는 꿀벌들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 아닌가? 이 모두를 떠 안은 그 세계는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기도 하며, 한국 사회에는 여왕벌 따위의 존재나 가능성은 애초 없기도 하고 가능치도 않다. 총선 나아가 대선 등의 선거를 거쳐, 새로운 리더가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렇게 구심은 바뀌어도, 딱히 드라마틱한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세계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살아가는 당신, 우리가 주인공이 되고 힘을 가져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글들을 자세히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과 맥락이 닿지 않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